[이코노믹포스트=주장환 논설위원] 미국 대통령 선거에 나섰던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를 선언하면서 미국인들은 물론 전세계 사람들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케네디가(家) 형제들도 “가족의 가치를 배반했다”며 들고 일어났다. 지난달 케네디 주니어의 형제자매인 캐슬린과 코트니, 케리, 크리스, 로리 케네디 등 5명은 입를 모아 “우리는 희망으로 가득찬 미국을 원하고 더 밝은 미래를 향한 공통의 비전으로 함께 뭉치고 싶다”며 “트럼프를 지지하기로 한 형제 보비(케네디 주니어의 별명)의 결정은 아버지와 가족이 가장 소중히 지켜온 가치를 배반한 일”이라고 비판했다. 사실 케네디가는 아일랜드에서 이민 온 뒤 전통적으로 민주당을 대표해 왔다. 이민 1세인 패트릭 케네디는 배고픔을 참지 못해 배 밑바닥에 고인 물을 마시며 미국 보스턴으로 건너갔다. 지금으로부터 약 150여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삶은 만만치 않았다. 그는 한 방에 20여명이 처박혀 자는 지하셋방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먹고 살기가 어려워진 그는 공사판을 떠돌다가 술통 제조공장에 취직했으나 고생만 하다가 콜레라로 사망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조셉 패트릭은 달랐다. 폭력과 기만, 사기가 넘치는 보스턴에서 특유의 수완으로 술통 만드는 일을 벗어나 술집을 사들였다. 이후 은행원을 하다가 ‘신의의 지키는 사나이’라는 평판을 얻어 28세에 주의 회의원이 되었다. 조선소에서 밥집을 하며 돈을 벌었고 주식에 뛰어들어 공거래 치는 수법으로 일확천금을 거머쥐었다. 1932년 대통령 선거에 나선 루스벨트를 도와 당선시켰으며 증권거래위원장, 주영대사 등을 지냈다. 1887년 결혼해서 얻은 자식이 바로 존 F. 케네디다. 이민과 공사판 생활, 술통 제조업제 생활 등은 케네디가의 정치적 자산이다. 오늘날 미국 최고의 명문가로 우뚝 서있지만 복지정책 확대, 소수자 인권보호 등을 추구하는 민주당의 정체성과 부합한다. 그런데 1963년 총격으로 피살된 존 F.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조카이자, 1968년 역시 총격에 목숨을 잃은 그의 동생 로버츠 F.케네디 전 상원의원의 차남인 케네디 주니어가 이런 정체성을 버리고 공화당의 트럼프를 돕겠다고 나섰으니 가족들이 질겁할 만하다. 케네디 주니어는 지난해 4월 민주당에 대선후보 경선 출마 신청서를 제출했으나 희망이 없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그러나 이길 가능성이 사라지면서 트럼프 당선시 한 자리를 보장받고 방향을 틀었다고 한다. 케네디가의 명망에 맞지 않는 처신인 셈이다. 케네디가는 전통적으로 가족간의 우애와 화목을 중시한다. 특히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어머니 로즈여사는 이런 점을 늘 강조하며 형제자매를 결속시켜 왔다. 그러나 이미 세상을 떠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을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EP jjh@economicpost.co.kr <저작권자 ⓒ 이코노믹포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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